[남시언의 맛있는 책 읽기](182)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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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 책을 이야기하면서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이 책의 제목만 보고서는 선 뜻 구매해버렸다. 내 '예감'엔 영미식 자기계발서적이었다. 내 '예감'에 이 책의 내용은 '예감을 활용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는 방법'정도였다. 쉽사리 구매해버린 책이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배송되어 내 책장 가장 상단에 꽂혔다. 접히는 부분없이 한 동안을 그렇게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책을 꺼내들었고, 펼쳤고, 읽었다. 읽기 시작했을 때, 내 '예감'은 완벽하게 '틀렸'다. '기억'과 '예감'을 주제로 한 줄리언 반스 작가의 소설이었다. 보통 출판사 책 소개나 목차 정도는 읽고 책을 구매하는 편인데 이 책만큼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두 번의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는 이 책이 소설이라는 걸 알았을 때 받은 충격, 그리고 책을 모두 읽고나서 그 내용때문에 받았던 충격. 말하자면, 책을 펼쳤을 때와 책을 덮었을 때 각각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받은셈이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습니까? 정말? 확실합니까?”

우리들이 생각하는 ‘기억’이란 마치 흑백사진처럼 흐릿하지만 본질은 선명한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언제나 왜곡되고 감정에 의해 바뀌고 시간에 따라 이리왔다 저리왔다하는 갈대같은 녀석이다. 떠올릴 때마다 재해석되고 거의 완벽하게 변질된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이란 그 자체만으로는 신빙성을 장담하기가 어렵다. 기억을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 모든게 혼란스러워진다. 심지어 나 자신이 나 자신이 맞는지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지나온 세월과 경험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예감이 기억보다 더 정확할 때가 있다. 말하자면, 실제 경험했던 과거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더 확실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란 것 자체가 작가의 말처럼 '인생처럼 혼란'스럽다.


책 밑줄긋기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이 책은 주인공 토니 웹스터의 과거 회상으로 시작한다. 책의 모든 것이 주인공의 과거 회상 편지이자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토니의 학창시절을, 2부는 토니의 인생 말년을 추억한다. 추억과 기억. 이 두가지 모두 실제 있었던 현실 그대로지만, 실제 있을 그 당시가 지나고 순식간에 '과거'가 되어버리면 더 이상 현실 그대로가 아니게된다. 자신이 원하는바를 덧칠해버리고, 일부 왜곡되고 일부는 사라지고 일부는 이상한 방향으로 선명하게 기록된다.


책 밑줄긋기

그러나 시간이란......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나는 어제 저녁에 술을 먹었다. 그런데 과연 그 기억이 가짜라면 어떨까? 철석같이 믿었던 기억이 어느날 정확한 증거물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있다. 남자는 주인공 토니 웹스터와 자살로 스스로를 '철학적으로 자명하게'한 에이드리언. 여자는 베로니카다. 토니와 베로니카는 연인 관계였으나 이후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이 사귀게된다. 보통 그렇듯 패기 넘치는 시절의 남녀관계는 이렇게 엮이고 저렇게 엮이는 법이다.

그리고 두 통의 편지가 있다. 하나는 토니가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연애를 축하해주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기억 속의 편지'다. 책의 후반부에까지 이 편지는 '기억'속에서 유효하다. 나머지 하나의 편지는 실제 토니가 작성해서 부쳐버렸던 편지인데, 이 편지 내용에는 에이드리언이 죽을 것이며, 베로니카는 임신하고 어머니가 죽는 등 악담이란 악담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과거에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쉽게 말해서 토니는 자신의 '예감'으로 편지를 썻고, 그것이 현실화되어 이후에 나타난 상황을 맞았으나, 자신의 기억속에는 결코 '예감'으로 쓴 편지가 없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토니의 기억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던 독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부분에서 뒷통수에 총을 맞은 듯 어지러움을 느꼈다. 내 기억이 과연 실제한가?를 자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책 밑줄긋기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이 책은 어떤 결말이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혼란'만 더 추가한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인기를 끌고 <멘부커상>을 수상한 데엔 '예감'과 '기억'이라는 추상적인 환상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는 까닭이 아닐까?

수 많은 기억들이 나를 만들고 현재도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정말 실제와 일치할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기억 없이 살 수 없고 예감 없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처럼. 인생, 기억, 예감이라는 3가지 주제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묵직하게 회전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8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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