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의 무명생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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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의 무명생활 2

수 년은 참 긴 시간이었다. 나는 극심한 외로움을 겪으면서 공포영화도 못보는 주제에 귀신이라도 만나고 싶어질만큼 쓸쓸했다. 서른줄 친구들의 대화 주제는 항상 월급, 직장생활, 결혼, 연애, 정치, 자동차, 부동산, 적금 따위였다. 그런 것들은 나와 전혀 관계가 없었고, 내 귀에는 배부른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는 것 밖에 없었다.


내 무명생활은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지였다. 이 대지가 현실에 존재하는 내 땅이었다면 난 재벌이었겠지. 대한민국에서 20대 끝물 남자가 적금하나 없다는 사실을 떠들고 다니면 인간쓰레기를 증명하는 짓밖에 안되는 까닭에 돈과 관련된 얘기가 나올때면 침묵으로 일관했다.

꿈, 세계관, 창조적인 지식근로, 또라이 기질, 도전정신, 미래적 천리안같은건 갖고 있지도 않았지만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눌 사람조차 없었다. 주변은 모두 평범하면서도 치열했으며 나만 나태하고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땐 그랬다.

나는 포기하기 싫었다. 쓸데없어보이는 이런저런 일들을 해볼까 싶다가도 에이 아니다 싶은 마음에 다시 글쟁이의 숙명에 몸을 담궜다. 당시에 내가 의지할건 오로지 책이었다. 서점에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많은 저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느끼는 한편 그들의 성공담과 후기가 왜 나만 피해가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기에 아리송했다. 몇 년이 흐르면서 나는 내 미래를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대로 끝. 정해진 결말처럼 보였다.

이즈음 <새벽 2시>라는 자작곡을 만들었다. 이 곡의 가사는 당시의 내 세계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데, 대충 이런 노랫말이 나온다.

졸리지는 않은데 잠자리에 누워보네
방문에서부터 생각들이 내 머리에 붙어 꼬리 꼬리 무네
별로 한 게 없어 오늘 하루 어리버리 시간가네
내 하루는 밥먹고 자고 싸고
밥 먹고 자고 싸고 밥먹고 자고 싸
친구들은 전부 출근을 해 직장에서 일을해 돈을 벌고 연애를 해
모여있는 단톡방에 인사해도 읽는 사람없어 메아리만 오네
바쁘게 살고 있어 다들 정신없어보여
동떨어져 살고 있어 나만 다르게
나태해진 거울 속의 나를 볼 때 마다
자라나는 턱수염이 찐해질 때 마다
스스로를 향해 화이팅을 외쳐봐도
일상에 변화없어 이상해

꿈도 많았는데 말야 어린시절
벌써 아저씨 소리들어 버젓이
이뤄놓은 것도 없이 내일모레 서른
너무 빨리 성장한 아이 어른

시곌보니 벌써 새벽 2시 쓸쓸한 시간에 말짱해
소주 한잔에 혼잣말로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며
생각에 잠겨 회상하곤해
나름대로 힘들어 불투명한 미래
이것저것 도전해도 마치 전부 지뢰
끝나는건 아닐까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되지 않고 지금 그대로
두렵기도 해 사실 크게 성공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하고싶어하는 가슴
머리위에 달 빛 가로등에 비춰진
나는 막연하게 살고 있는건 아닐까
난 누굴까 잘하는건 뭘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알 수 없는 늪에 빠진듯해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를 먹다보니 주변인들은 성공 또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고 나는 항상 제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느낌이었다. 나 스스로를 생각해볼 때 발전도 없어보였고 미래도 어두웠다.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오뚜기처럼 난 항상 제자리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했지만 결국엔 계속 제자리인, 뫼비우스 띠를 멤도는 부메랑이었다.

나는 충분히 잘하고 착각했다. 어느날, 나는 좀 더 날카로워질 필요성을 느꼈다. 장점을 다듬고, 지금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일하고, 더 많은 전략을 연구하고 실험할 필요성을. 말하자면 송곳을 갈아서 더욱더 뾰족하게 만드는 작업같은게 있어야한다는 판단이 섰다. 이대로는 내가 원하는걸 절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진건 몸뚱아리가 전부인것을. 돈도 경험도 지식도 인맥도 없었기에 사면초가나 다름없었다.

나는 현재보다 좀 더 많은 글을 쓰고,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여행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겠다고 다짐했다. 고작 책 한 두권 써낸 주제에 몇 년안에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심은 보기좋게 빗나갔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세상을 만만하게 보는 철없고 어리석은 남자였다.

한 사람이 특정 집단에서 알려지기까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노력과 운이 마주치는 공간에서 입소문은 이루어진다. 그러니 유명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오랜시간 묵언수행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고통과 고민은 기본이요, 포기하고싶어질 마음을 억누를 때의 정신파괴는 덤이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이때의 시간들은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없어서는 안 될 탄탄한 굳은살이 되었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건 경제적 어려움이나 불투명한 미래가 아니라 '나 혼자'라는 느낌. 범위를 많이 넓혀 웬만한 젊은이들을 포함하더라도 나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주변에서 단 한명도 찾을 수 없었던 탓에 무척 괴로웠다. 내 머릿속을 몽땅 채우고있는 그 무엇을 누군가와 공감하면서 얘기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릎이 꺾였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나는 주변인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세월을 거치면서 변색되어버린 다락방 한켠의 어느 책 표지처럼 비슷한것들과의 공통점이 사라져서 이제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모양새다.

특히 2014년은 최악이었다. 나는 아무곳에도 쓸 일 없는 강의 자료를 만들면서 기술을 연마하고 읽는 사람없는 문서와 블로그 글을 써내려가야만했다. 불필요해보이는 뉴스를 보고 기사를 읽고 블로그 글들을 구독했다.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경제경영서적들을 탐독하고 보다 풍부한 표현력을 갖추고자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었다. 지역에 맞춤화된 SNS 마케팅을 연구하고 실험하면서 시간을 보냈으나 당연하다시피 쓸모는 없었다. 오랜 시간동안 관련 자료들을 수집해서 준비해놓고 뇌관만 터지면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두었지만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 수요가 있었지만 적임자는 내가 아니었다. 공급과 수요, 그 중간단계가 콱 막혀버린 하수도마냥 답답하게 느껴졌다. 정말 벼랑 끝까지 몰렸다.

읽는 사람 없는 글을 쓰는 일... 보여줄 일 없는 프레젠테이션과 강의 자료를 만드는 일... 도움이 안되 보이는 책을 읽는 일... 돈 안되는 무엇을 하는 일... 효율도, 원인도, 결과도 없는 무지한 일들... 이런 것들이 내가 2014년까지 했던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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