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자의 기록] 단무지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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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정 때문에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시장통에 있는 김밥집에 들렀다.
꽤 이른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장통 중간쯤에 있는 김밥집이기에 내부가 그리 크지 않아,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입구쪽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김밥 2줄과 참치김밥. 사실 나는 땡초김밥을 좋아하지만 빨리 먹고 이동해야 했기에 무난한 참치김밥을 먹기로 했다.
이곳은 시장통에 있는 김밥집이라 가격은 저렴한 편이다. 나는 학생때부터 여기를 자주 애용하고있다.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있다보니, 앞에 있는 문구가 보였다.
'물은 셀프'
"아, 물이나 좀 마셔야겠다."
 





컵에다가 잔뜩 물을 떠오는데, 내 자리에 방금 들어온듯한 어떤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아, 할머니 거기 앉으세요. 저는 여기에 앉을게요."
다른곳을 찾아봤지만 자리가 없었기에, 결국 나는 처음보는 할머니와 한 테이블에서 마주보며 김밥을 먹게 되었다.

나는 정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김밥에 얼굴을 파묻고 밥만 먹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던 그 할머니는 '물은 셀프'와 함께 단무지도 조금 담아 가져오셨다.
한참 밥을 먹었을까. 할머니가 손짓을 했다.
"이 단무지 좀 잡숴"
"아, 할머니. 저는 단무지 안먹어도 되니 할머니 많이 많이 드세요."
"내한테는 만타(많다)"


처음보는 나에게 할머니는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셀프 단무지는 원래 남기면 그만이다.
할머니는 고작 김밥 딱 1줄만 드시고 계실뿐이었다. 김밥 1줄의 가격은 900원.
할머니의 나이로 미루어보건대, 아무리 못해도 나보다 연배높은 아들이 몇명쯤은 있을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손자뻘쯤 될법하다.

단무지는 총 4개.
할머니가 다시 한번 손짓했기에 나는 예의상 단무지 하나를 집어먹었다.
먼저 할머니가 하나 드셨는가보다.
이제 남은 단무지는 2개.
"이 단무지 좀 잡숴요"
"아하. 저는 단무지 별로 안좋아해서… 할머니가 많이 드셔야지요"
"내한테는 만타. 좀 거들어줘"


그 뒤로 할머니는 다 드신 김밥을 뒤로하고 인사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접시에 단 하나 남은 단무지 1개.
마지막으로 내 입으로 슥 밀어넣으며 나도 자리를 일어섰다.

그러고보니 우리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나는 어릴적에 외할머니와 오래도록 살았기에 할머니와의 추억이 많이 있다.
예전에도 나의 외할머니는 처음보는 누군가와 금방 대화를 나누곤했다. 그 당시의 나도, 지금의 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할머니에겐 아주 익숙한 상황이었던 듯 하다.
어쩌면 여성들의 생물학적 친화력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거랑은 성격이 조금 다른것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런 거리낌없이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있는걸까?
그러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경계와 의심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그런 기술.
그리고 헤어질 땐 아무런 아쉬움이 없는듯 갈 길을 가는 그런 초연함.
좋은걸까, 나쁜걸까.

고향집에 있는 인심 가득한 할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들.
그들은 누구와도 쉽게 이야기를 나누지만,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지 않는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절대 모순이 아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신뢰하면서도 동시에 불신할 수 있다.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서로 의심하고, 마음을 열지 않을수도 있다. 충분히!

우리내 할머니들의 내면을 살펴보면 남모르는 아픔과 고통, 피눈물이 자리하고 있을것이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나는 어릴적 외할머니가 숨어서 흐느끼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몇 번 본적이 있다. 그들도 여자고, 그들도 사람이며, 고귀한 존재다.

마치 나의 외할머니 같은 '단무지 할머니'가 떠나간 뒤,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기분은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사람이 극심할 정도로 슬프면 눈물을 흘리거나 통곡하지 않는다. 그저 멍~ 할 뿐.

'단무지 할머니'도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할머니, 또 외할머니일 것이다.
오늘은 누군가가 '단무지 할머니'에게 전화 한통이나 했으면 좋겠다고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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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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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24 11:12 신고

    왠지 모르게 와 닿네요~
    저도 안부전화좀 드려야 할 것 같네요~

  • 2012.08.24 11:30 신고

    외할머니 생각나네요....

  • 2012.08.24 11:40 신고

    나는 언제부터 할머니된건지 모르겠어요 (-. -
    막 말거는데? 모르는사람한테? 나 왜이래..?ㅋㅋㅋ

  • 2012.08.24 12:04 신고

    세월이란 놀라워요.
    늙는다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글이네요 ㅎㅎ

  •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08.24 12:55

    티몰스님이 따뜻한 글 잘보고 갑니다.
    갑자기 저도 할머니가 보고 싶어지는데요..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지만.....ㅠㅠ
    그럼 총총~~~^0^

  • 익명
    2012.08.24 14:46

    비밀댓글입니다

  • 2012.08.24 14:49 신고

    김밥한줄에 900원 하는곳이 아직도 있나보네요. ^^;
    저도 할머니 생각이 나네요.

  •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08.24 14:56

    뭔가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는 이야기 입니다.

  •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08.24 14:58

    좋은 글이네요..
    너무 잘 읽어보구 갑니다..^^

  •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08.24 15:02

    좋은글 잘 읽고 가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08.24 15:10

    저런 경험은 요즘 못 하는 것 같아요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잘 보고 갈게요^^

  •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08.24 15:54

    정말이지 남의 할머니는커녕 제 할머니한테는 전화도 제대로 못 드리고 있네요. 이제 유일하게 남아계신 할머니인데...

  • 2012.08.24 17:14 신고

    왠지 정말 짠해지는 글이네요- 첨 글만 보고, 갑자기 김밥이 먹고 싶어졌단 생각만했었는데 ;;;;

  • 2012.08.24 17:23 신고

    외할머니 장례식에 못간게 스스로가 너무 안타깝네요.
    저희 엄마 교육방식이 잘못된게, 장례식 보다도 학교를 우선시하는 사람이라 제가 짜증날때도있어요.
    더군다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말 없이 저희 학교보내고 혼자 장례식을 가신...

    그때 하늘 올려다보며 외할머니가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니깐 기분이 정말 그로테스크하더군요...

  • 2012.08.24 17:28 신고

    잘 보고 갑니다.
    뭔가 짠하면서도... 생각을 하게 만드는 듯 하네요.
    그나저나 900원짜리 김밥이라니, 요즘에도 그런 곳이 있군요!! :)

  • 2012.08.24 17:53 신고

    저는 숙연해지면서, 되돌아보게 만드는 소중한 글이네요

  • 2012.08.25 00:41 신고

    남보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되는데...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이죠~

    오늘은 특별한 기분을 느낀 하루가 되었겠네요.

  •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08.25 06:14

    저는 노인들께 말을 잘 걸어요. 남에게 말을 잘 거는 성격은 아니지만, 노인들은 누가 말을 걸어도 자연스럽게 덤덤하게 잘 받아줄 거라 믿고 있기 때문이죠. 그들은 언제나 젊은 세대가 말을 걸어주길 바라고 있을 지도 몰라요.

  • 2012.08.25 07:30 신고

    아직 900원짜리 참치김밥이 있나요? ㅎ,ㅎ 우리동내는 참치김밥 2000원인가 1500원으로 기억하는데^^;; 할무니분들은 다 비슷하신 것 같아요. 한결같은 마음이시랄까 ㅎ,ㅎ 어려운 시대를 사셨으니까요.

    • 2012.08.27 08:45 신고

      참치 김밥은 아니구 일반 김밥이에요~ㅋㅋㅋ
      참치김밥은 2500원 이었던가...;;

  • 2012.08.27 10:53 신고

    오늘은 할머니께 안부전화 드려야겠네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잘 봤습니다...^^

    • 2012.08.31 08:27 신고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ㅎㅎㅎㅎ
      안부전화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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